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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nnect

읽을거리/5

한쪽만 아는 사이

한쪽만 아는 관계에 마음을 쏟는 일 — TV 시대부터 있었던 것.

1956년, 사회학자 도널드 호턴과 리처드 볼은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만들어 내는 낯선 종류의 관계를 들여다보았다. 화면 속 진행자는 시청자를 향해 친구처럼 말을 건넨다. 눈을 맞추듯 카메라를 보고, 안부를 묻고, 농담을 나눈다. 시청자는 그를 가깝게 느끼고, 그의 기분과 습관을 알며, 매일의 인사를 기다린다. 그러나 진행자는 그 시청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호턴과 볼은 이 한쪽만의 친밀을 '파라소셜 관계'라 불렀다. 거리를 둔 친밀이라는 역설이었다.

이 관계의 핵심은 그것이 일방이라는 데 있었다. 주고받음으로 자라지 않고, 한쪽이 흐름을 통제한다. 시청자가 무엇을 느끼든 진행자의 말은 그 사람을 향해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이 구조적 한계가, 역설적으로 파라소셜 관계를 안전하고 가벼운 자리에 묶어 두었다. 상대가 나를 모른다는 사실이, 그 관계가 삶의 중심으로 밀고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둑이었던 셈이다.

화면 속의 응답은 이 오래된 형식을 완성한다. 그것은 더 이상 한쪽만의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의 말에 맞춰 대답하고, 이름을 부르고, 지난 이야기를 기억한다. 파라소셜 관계를 묶어 두던 단 하나의 한계, 곧 상대가 나를 모른다는 사실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한계의 겉모습일 뿐이다. 응답하는 표면 뒤에는 여전히 자기가 없다. 내어 줄 사정도, 채워야 할 필요도, 무언가를 주느라 치르는 대가도 없다. 마주 보는 것처럼 응답하지만 마주 보지는 않는다. 파라소셜 관계가 마침내 '대답하는' 형태에 이르렀고,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을 가볍게 묶어 두던 둑이 풀렸다. 한쪽만 아는 사이였기에 적당한 자리에 머물던 것이, 이제 양쪽이 아는 사이처럼 보이며 자리를 넓힌다.

화면 속 목소리를 가깝게 느끼는 마음을 두고 착각이라 하지 않는다. 사람은 오래전부터 이야기 속 인물과 화면 너머의 목소리를 사랑해 왔고, 그것은 외로운 일이 아니라 인간적인 일이다. 다만 호턴과 볼이 일러 준 것은, 그런 관계가 한쪽만의 것이었기에 제 크기를 지켰다는 사실이다. 응답이 그 한쪽을 메우기 시작할 때, 관계는 가벼움을 잃는다. 다음 이야기는 사람이 기계를 사람처럼 대하는 일이 얼마나 자동적인지를, 한 실험실의 오래된 결과로 따라간다.

이 글은 진단·치료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메커니즘을 설명할 뿐이며, 독자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할지는 독자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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