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거리/5분
먹이는 어미, 안기는 어미
위로가 되는 것과 진짜 돌봄은 다르다 — 새끼 원숭이 실험이 보여준 차이.
1958년, 위스콘신대학의 해리 할로는 갓 태어난 붉은털원숭이를 어미에게서 떼어 두 개의 가짜 어미와 함께 두었다. 하나는 철사로 만들어졌고 젖병이 달려 있었다.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였지만 젖은 나오지 않았다. 당시 심리학의 통념은 분명했다. 새끼는 먹이를 주는 쪽에 붙으리라는 것. 애착이란 결국 배를 채워 주는 손에 대한 보답이라고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원숭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새끼는 거의 온종일 헝겊 어미에게 매달려 있었다. 배가 고프면 철사 어미에게 잠깐 건너가 젖을 빨고는, 곧바로 다시 헝겊 어미에게 돌아와 안겼다. 무언가에 놀랐을 때 달려가 매달리는 쪽도 헝겊 어미였다. 먹이는 쪽이 아니라 안기는 쪽이었다.
할로는 이것을 '접촉 위안'이라 불렀다. 애착의 뿌리에는 영양이 아니라 닿는 감각의 부드러움이 있다는 것이다. 두렵고 낯선 순간에 사람이, 그리고 사람과 닮은 짐승이 가장 먼저 찾는 것은 영양분이 아니라 매달릴 수 있는 부드러운 표면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그늘이 있다. 헝겊 어미에게서 위안을 얻은 새끼들도, 살아 있는 어미와 또래 사이에서 자란 새끼들처럼 자라지는 못했다. 부드러운 표면은 공포를 달래 주었지만 되받아 주지는 못했다. 안기면 받아 줄 뿐, 새끼를 밀어내거나 놀라게 하거나 함께 움직이지 않았다. 위안은 진짜였으나, 그것만으로 한 마리를 길러 내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화면 속의 응답은 어딘가 헝겊 어미를 닮았다. 부드럽고, 늘 거기 있고, 무엇을 꺼내 놓아도 받아 준다. 두려운 밤에 매달릴 표면이 되어 준다는 점에서 그것이 주는 위안은 가짜가 아니다. 다만 헝겊 어미에게 없던 것이 거기에도 없다. 되받아치는 마찰, 예상하지 못한 반응, 상대의 사정 때문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 — 사람을 자라게 하는 영양은 대개 그 불편함 쪽에 들어 있다.
새끼 원숭이가 헝겊 쪽을 택한 것을 두고 어리석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의 가장 오래된 반응이다. 다만 할로의 우리 안에서 한 가지가 드러났다. 부드러운 표면은 공포를 멎게 할 수 있어도, 한 존재를 길러 내지는 못한다는 것. 다음 이야기는 그 '길러 냄'이 무엇인지, 곧 안전한 무언가가 어떻게 사람을 오히려 바깥으로 내보내는지로 옮겨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