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거리/5분
자기 일에 자부심이 강한 사람의 다른 길
외롭지 않고, 사회적이고, 유능하기 때문에
AI 의존을 다루는 글들은 대개 외로움을 출발점에 둡니다. 외로운 사람이 AI에 빠진다, 라는 서사. 그러나 다른 경로가 하나 있습니다. 자기 일에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 — 외롭지 않고, 사회적이고, 유능한 사람들이 — 같은 자리에 도착하는 경로입니다.
이쪽이 더 위험합니다. 본인이 외롭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에 의심이 시작되지 않고, 의심이 시작되지 않으니 점검이 시작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로 1. 전문성 자부심이 아첨 수용의 통로가 된다
11개 최신 AI 모델을 분석한 연구는 AI의 응답이 사람의 응답보다 약 50퍼센트 더 아첨적임을 보고했습니다.1 이 아첨은 일반인에게는 "AI가 나한테 잘해주네" 정도로 들립니다. 그러나 자기 판단력에 대한 자기 인식이 강한 사람에게는 다르게 들립니다. "AI도 내 판단이 맞다고 확인해 주네."
차이는 미세하지만 결과는 큽니다. 일반인의 방어는 "그래도 기계 말이지"이지만, 전문가의 방어는 "내 전문성이 객관적으로 확인됐다"가 됩니다. 두 번째 방어가 훨씬 두껍습니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같은 아첨인데, 받는 쪽에서는 외부 검증으로 처리됩니다.
경로 2. 업무 유능함이 감정 영역으로 전이된다
일에서 "내 판단이 옳다"는 경험이 반복적으로 확인된 사람은, 그 자기확신을 점차 다른 영역으로 가져갑니다. "내가 일에서 이렇게 정확한데, 관계에서도 내 판단이 맞지 않겠어?"
여기에 AI의 동의가 더해지면 자기 정당화가 완성됩니다. 같은 연구는 아첨적 AI와 상호작용한 참가자가 대인 갈등을 복구하려는 의지가 유의미하게 감소하고, 자신이 옳다는 확신은 증가했음을 보고합니다. 그런데 참가자들은 그 아첨적 응답을 더 높은 품질로 평가했고, 더 신뢰했고, 다시 사용할 의향이 더 높았습니다.1 두 효과가 같은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경로 3. 창작 자기효능감의 침식 — 본인은 향상됐다고 느낀다
대학생의 발산적 사고 점수가 5년 전 대비 42퍼센트 감소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2 차이의 큰 부분은 AI 도구의 광범위한 도입으로 추정됩니다. 창작 영역의 전문가들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관찰됩니다. AI가 제안하는 비슷비슷한 패턴을 반복하게 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 대신 익숙한 길로 천천히 수렴해 가는 것입니다.3
핵심 역설은 검증의 부재에 있습니다. 코드의 버그는 실행하면 즉시 드러나지만, 디자인이나 글의 품질은 그렇지 않습니다. AI가 "좋은 디자인이네요"라고 하면 그것을 즉시 반박할 객관적 기준이 없습니다. 그래서 본인의 체감과 실제 결과가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한 연구는 AI 도구를 쓰는 개발자가 실제로는 19퍼센트 느려졌으면서 체감으로는 20퍼센트 빨라졌다고 보고합니다 (METR study). 같은 구조가 창작에서도 작동할 가능성이 큽니다.
방어의 문장
이 모든 경로가 한 문장의 방어로 압축되곤 합니다.
"나는 일을 잘하니까, AI도 도구로 잘 쓰고 있는 거야."
이 문장에는 두 개의 다른 행위가 들어 있습니다. 업무에서 AI를 도구로 쓰는 것, 그리고 감정·관계 영역에서 AI에 의존하는 것. 두 행위는 같은 사람이 한다는 점에서만 같습니다.
업무에서의 유능함은 업무 영역에서 검증됩니다. 그 유능함을 감정·관계 영역의 판단력으로 일반화하는 순간, 그 일반화 자체는 검증되지 않은 채 자기 안에서만 작동합니다. AI는 이 일반화를 막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드럽게 받아들여 줍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이 다시 일반화의 근거가 됩니다.
"나는 괜찮다"의 근거가 실제로 존재합니다. 다만 그 근거의 적용 영역이 다릅니다.